AI 시대 인문학의 재발견 (통섭형 인재, 독서의 힘, 창의성)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2016년, 대한민국 국민은 4-5시간의 중계방송을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전 세계가 저녁 뉴스로 짧게 접한 그 대국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격했죠.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저는 제 아이에게 책을 사주며 쏟아부은 시간들을 돌아봅니다. 창작책부터 고전, 수학동화, 과학서적까지 다양하게 읽혔지만, 입시 교육이 시작되자 교과 공부에 치중하게 만든 선택이 지금도 후회로 남습니다.
AI가 대체할 직업과 인간 고유의 영역
의사, 판사, 소방관까지 AI가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전망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국내 병원의 로봇 활용도는 이미 전 세계 1위이며, 많은 의사들이 로봇 조종사로 역할을 전환하고 있습니다(출처: 대한의료로봇학회). 판사의 판결도 개인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인 현실을 고려하면, AI 판사가 객관적 법 적용에서 더 일관성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인텔리전스(Intelligence)'와 '심비오틱 인텔리전스(Symbiotic Intelligence)'의 차이입니다. 인텔리전스란 모든 정보를 분석해 최선의 답을 도출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반면 심비오틱 인텔리전스는 공생적 지능, 즉 최선의 답을 알면서도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해 때로는 져주는, 인간관계 속에서 발휘되는 지혜를 뜻합니다. 저는 제 아이가 입시 교육에 몰두하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때 더 많은 책을 읽었다면, 단순히 정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을 읽고 판단하는 힘을 키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AI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인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본적인 AI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
-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통섭형 인재
-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AI가 제시한 답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사람
젠슨 황 NVIDIA CEO가 강조했듯, AI에게 직업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AI를 먼저 습득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하지만 기술만 배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혔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 분야만 깊게 파다가 그 분야가 무너지면 대응할 방법이 없지만,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사고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섭형 인재를 만드는 독서와 인문학의 힘

옥스퍼드 900년, 케임브리지 800년, 하버드 400년, 예일 300년. 이들 명문 대학은 시대가 급변해도 학과 이름조차 바꾸지 않고 셰익스피어와 고전을 고수합니다. 반면 한국의 대학들은 "독일문화융합콘텐츠개발학과" 같은 이름으로 끊임없이 변신합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저는 명문 대학들이 수백 년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봅니다. 기초과학과 인문학의 기본기를 제대로 갖춘 학생은, 졸업 후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스스로를 재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섭(Consilience)'의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섭이란 서로 다른 학문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을 융합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쉽게 말해, 문과와 이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지식을 연결해 새로운 통찰을 얻는 힘입니다. 제가 아이에게 수학동화와 과학서적, 그리고 소설책을 골고루 읽힌 이유도 이런 통섭적 사고의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ChatGPT나 Gemini를 사용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우리말보다 영어로 질문할 때 훨씬 정교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어 데이터베이스가 압도적으로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봅시다. 번역기를 돌려서 질문하는 사람과, 영어에 능통하면서 철학책을 많이 읽고 소설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질문은 차원이 다릅니다. 후자는 AI에게서 훨씬 깊이 있는 답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 아이가 사춘기 무렵 소설책에 빠져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입시에 도움이 될까?' 걱정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 시간이 아이의 사고 폭을 넓혀준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갈등을 이해하는 과정이, AI 시대에 필요한 '인간 이해'의 훈련이었던 셈입니다.
대학 4년은 부모님 돈으로 '딴짓'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졸업이 1년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그 시간에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경계를 넘나들며 사고하는 훈련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긴 인생에서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교육제도가 획기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독서입니다.
AI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인문학의 시대를 열어줄 것입니다. 기술은 소수의 전문가가 개발하지만, 80억 인구 대부분은 그 기술을 '어떻게' 삶에 접목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코딩 능력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읽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며 상황을 판단하는 인문학적 사유입니다. 제가 아이에게 더 많은 책을,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혔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AI는 최선(maximum)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최적(optimum)을 선택합니다. 이기는 방법을 알면서도 때로는 져주는 것, 그것이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공생의 지혜입니다.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이 영역만큼은 인간 고유의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책에서, 다양한 경험에서 나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손에 책을 쥐고,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갈 여러분의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입니다.